칼럼: 화합과 소통...



최근 "화합과 소통"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 절실하다는 생각을 했다. 극단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항시 투쟁을 유발해서 사회에 불안정을 일으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형제 야고보와 요한은 우레의 아들들(보아너게)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다혈질이고 야심에 찬 이들이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날 좌우에 앉게 해달라는 요구를 서슴없이 했고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보면 불을 내려 멸하자는 폭력적이고 편협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 극단적이고 급한 성격 탓에 야고보는 12제자들 중 가장 먼저 목에 잘려 순교를 당했다. 하지만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변신을 했고, 겸손과 희생의 삶을 강조했다. 즉, 인격적으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한 제자는 요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랬기에 요한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마지막 성경인 요한계시록을 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많은 대형 교회들이 보여준 극단적 정치 성향을 보며 정말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원인이 뭘까 하는 궁금함을 좇아 분석을 하는 과정에 살아남기 위한 선택의 과정이란 결론을 내렸다. 제주도 4.3사건을 주도한 영락교회 서북청년단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내 공산주의 혐오가 현 대형 교회들이 보이는 보수적 입장을 대변한다. 잘못되고 삐뚤어졌지만 그들이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하는 것은 과거부터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해왔다는 의미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생존을 선택했을 뿐 신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과연 신의 편에 섰다면 정의를 이유로 극단적 성향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의 생존 투쟁의 결과는 교회의 대형화로 이어졌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은 모두 대한민국에 있다. 그러나 사람 수가 많다는 것이 그들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는 아니다. 기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이지만, 최근 보수나 진보 성향의 교회들은 진리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기독교가 마치 선동을 일삼는 종교로까지 비춰지고 있으니 말이다. 

공포, 분노나 희망과 같은 감정을 자극하되 거짓말을 크게 해서 단순한 메시지와 함께 반복하면 대중은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밝힌 선동 이론이다. 그 이론에는 선동된 사람들은 강한 이가 배경이 되어 지원하며, 적을 특정하면 바로 공격하게 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서부지법의 폭동을 보며 그 선동이론이 그대로 사용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권력이 예전 같지 않고 곧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중국의 성장 둔화와 함께 부동산 시장 불안정, 청년 실업률 증가 등으로 중국 국민들의 불만이 증폭되고 있고 그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권력이 집중되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란 비판이 일면서, 후진타오 시대의 집단지도체제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하나 둘 늘고 있다.

시진핑이 부정부패 척결을 부르짖으면서 군부 숙청까지 진행하며 측근을 요직에 앉히는 정책을 펴자 군부가 크게 반발했고 이제는 과거처럼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 같다. 특히 코로나19 대응은 국내외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샀고, 시진핑 3연임은 지금 한계 상황에 봉착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부패하고 치우치는 존재이므로 서로 견제하고 합의를 이루는 시스템을 원한다. 그래서 민주주의 시스템이 합의를 통해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과거 중국의 시스템이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한 것도 이를 방증한다. 

대한민국에 극단주의자들이 판을 친다면 우리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제발 "합의와 소통"을 통해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가 구현되기를 바란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칼럼: 초심을 잃지 않는 지혜...

계산적인 사람들...

산 자의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