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산 기행...(2003년)

 


1. 대전으로 향하다

얼마 전 TV를 통해 처음 본 대둔산의 모습은 내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그 산에 꼭 오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솟구쳤다. 그래서 아내에게 불쑥 내뱉었다.
“나 대둔산에 갈 거야.”
그 한마디가 계기가 되어 곧바로 실행으로 이어졌다.

나는 현재 직장에 얽매이지 않은 몸이기에 자유로웠다. 2003년 3월 31일자로 직장을 그만두었고, 지친 심신에는 휴식이 필요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생각을 늘 해왔기에 회사를 그만두는 결정은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여유는 인생에서 자주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늘 그렇듯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삶의 순간마다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체험은 1984년 2월 10일의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존재의 이유와 진리를 깨닫게 되었기에,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일 수는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내가 모순투성이임을 알았고, 지금도 발견되는 그 모순들 속에서 주님의 자리는 더욱 확고할 뿐이다. 이런 나를 자녀로 삼으신 사건은 내 인생 최대의 기적임을 고백한다.

드디어 2003년 5월 19일, 나는 인터넷에서 추천받은 대로 수원에서 대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이 가득했다. 이런 기분은 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와 흡사했다.

첫 직장에서 출장으로 일본을 갔을 때, 일본인 직원이 간사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고 나는 난생처음 신칸센을 탔다. 시속 200 km가 넘는 속도에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다. 낯선 땅 일본에서 나는 친절하고 당당한 사람들을 만났고, 삶의 현장마다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졌지만 점차 일본이 서서히 대단한 나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고도인 교토의 기요미즈테라와 금각사를 방문했을 때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택시 요금은 비쌌지만, 친절한 기사와 자동으로 닫히는 택시문이 인상적이었다. 일본의 절들은 소원을 적은 종이들로 넘쳐 났다. 기요미즈테라에서 시원한 약수를 먹었고, 녹차아이스크림을 처음 접했다. 난 그곳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깔끔한 일본의 모습을 감상했다. 그러나 금각사를 바라보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약탈한 금이 벽에 칠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순히 감탄으로 그칠 수만은 없었다.

기차는 예상보다 빨리, 한시간 반도 채 걸리지 않아 대전에 도착했다. 성경책을 읽다 보니 도착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미국 체류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미국의 메사추세츠주 챔스포드에 머물던 때, 일요일을 맞아 White Mountain을 방문할 요량으로 차를 몰고 나섰다가 중도에 포기했던 일이 있었다. 대신 돌아오는 길에 북쪽 나슈아 지역을 지나게 됐다. White Mountain은 Nathaniel Hawthorne의 ‘큰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로 유명해서 꼭 가보고 싶었던 지역이다. 지도상으로는 2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다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국도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본 미국의 울창한 숲과 강, 호수들은 니국의 여유로움을 느끼게 했고, 나는 압도 당한 채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찬송을 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대전역은 새 건물로 막 이전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역광장에는 유독 노인들이 많았다. 장기를 두거나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모습, 약장사의 연설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 서울 파고다공원을 떠올리게 했다.

2. 대전에서 대둔산으로

대둔산으로 가려면 버스를 이용해야 했는데, 나는 인터넷 사이트에 나온 정보만 믿었다. 대전 동부터미날이나 서부터미날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매시간 있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정보가 제때 갱신되지 않은 것이다. 

역에서 가까운 동부터미널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오후 세 시쯤이었는데, 택시 기사 아저씨가 말했다. 

“동부터미널은 대전 동쪽 노선들이 있는 곳입니다. 대둔산은 서쪽이라 아마 거기서 버스를 타긴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가까우니까 일단 가보시죠.”

아니나 다를까, 동부터미날에 도착해 보니 대둔산행 버스는 하루에 한번뿐이고 이미 떠난 상태였다. 순간 '이게 바로 교과서와 현실의 차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청평 대성리 유원지를 갔을 때도 그랬다. 

인터넷에는 주차비가 3,300원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실제로는 주차비를 받지 않고, 대신 사람당 1,000원의 입장료를 받는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두 아이와 함께 보트를 빌려 북한강에서 노를 저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까? 

보트 얘기가 나오니 괌에서의 추억도 함께 생각난다. 

PIC 호텔에 머물 때 아내와 카약을 저으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카약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아름다운 자연을 함께 누려보고 싶다. 제주도나 아침고요수목원을 함께 다녀왔을 때에도 나는 아이들이 창조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랐다.

어쩔 수 없이 서부터미날로 향했다. 851번 버스를 타고 40분 넘게 걸려 도착했다. 하지만 이곳도 예상과 달랐다. 하루 6번 운행하는데, 대부분 아침에 배차가 몰려 있고 오후 4시 이후에는 6시 20분 막차뿐이었다. 2시간 넘게 어떻게 시간을 떼워야 하나 고민하다가 만화방을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서점 주인 아주머니가 "손님이 별로 없어서 만화방은 벌써 없어졌다"고 했다. 대둔산행 버스가 뜸해진 것도 같은 이유일 거라 생각했다. 예전에는 1시간마다 있었다지만, 찾는 사람이 줄어 운행횟수도 준 것이리라. 그 순간 일본의 모습이 떠올랐다.

1994년 당시 방문했을 때 일본은 여전히 '지지 않는 태양'의 나라로 보였다. 미국은 일본을 배우려 했고, 일본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자만하던 시절이었다. 거리는 활기로 넘쳤고 도쿄의 불빛은 화려했다. 그러나 2001년에 다시 찾은 일본은 달랐다. 10년이 넘게 마이너스 성장을 겪으며 활력을 잃었고, 우에노 공원에서는 실업자들이 거지로 전락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문에서는 상위 5개 기업의 이익을 모두 합쳐도 한국 삼성전자의 이익에 못 미친다고 한탄했다. 일본은 예전의 자신감을 잃었고 어떤 이는 한국을 부러워했다. 정경유착으로 나라가 썩어갔고, 과거의 끈을 과감히 끊어 줄 지도자를 원했지만 고이즈미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신사참배를 강행하지 않았던가! 

나는 일본의 몰락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본 일본인들은 변화와 개방을 싫어했다. 자기 문화만 고집하며 외부 문물이 들어와도 일본식으로 흡수하려 했다. 여전히 도시에는 자전거 통학 행렬이나 도시락(밴토) 문화를 볼 수 있다. 옛날식 우산을 쓴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들만 옳다고 믿으며 세상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집트가 그랬듯, 일본도 몰락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 일본은 세계의 제조창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중국이 그 자리를 대신 꿰차게 될 것이다. 

시간을 떼우기 위해 성경책과 영작문 책을 읽었다. 그때 초라한 차림의 아주머니가 다가와 돈을 구걸했다. 나는 수중에 있던 동전을 모두 드렸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아주머니는 표를 산 사람마다 찾아가 돈을 구걸하고 있었다. 사연이 있겠지 싶어 애써 외면했다. 만약 내가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있었다면 아마도 인터넷을 서핑하고 있었을 것이다. 

공항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지금까지 다녀본 공항 중 가장 공항세가 비쌌던 곳은 일본 간사이 공항이었다. 인공섬 위에 지어져 감가상각 때문인지 세금이 높았다. 인천공항도 만만치 않지만 그곳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미국 뉴욕 공항에서는 까다로운 검색으로 인해 미국에 대한 좋은 기억이 희석되었다. 가장 복잡했던 공항은 일본 나리타였다. 출국 때마다 “Excuse me”를 연발하며 줄을 뚫고 나가야 했고, 입국 시엔 자국민 위주의 통관을 하기 때문에 외국인은 두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반면 홍콩 공항과 싱가포르 창이공항은 외국인에게 비교적 친절했다. 타이페이 CKS 공항에서는 한국으로 물건을 보내려는 아줌마들의 분주한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많은 양의 중국서적이나 물품 운반을 위해 여행객들을 이용했다.

드디어 시간이 되어 2,300원을 내고 표를 끊었다. 6시 20분에 출발 버스에는 나를 포함해 네 명뿐이었다. 대둔산 등산로는 크게 세 곳, 논산, 금산, 완주에서 오를 수 있다. 그중 완주 쪽이 케이블카도 있고 경관도 뛰어나 가장 인기 있는 코스다. 혹시 사람이 많을까 기대했지만,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버스를 타고 창밖의 시골 풍경을 보노라니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의 유년 시절은 다시 마음에 담아 보고플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버지가 교사라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나주에서 태어나 포두(고흥의 면소재지로 아버지 고향), 화순(동복 탄광촌), 순천까지 옮겨다녔다. 이런 잦은 이사에도 아름다운 추억들이 많아서인지 그때 그 시절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잠시 머물렀던 녹동과 광주에서의 추억도 떠오르곤 한다. 

어릴 적 나주에서 큰 눈이 내리던 날, 아버지가 마당에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두 살이었는데도 그 시절의 기억이 또렷하다. 어머니가 초등학교 교사셔서 학생들이 나를 업고 다녔는데, 내가 매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을 대신 혼내고 다녔다고 어머니는 지금도 말씀하신다. 

포두에서는 바다를 처음 접했다. 망둥이를 잡으려고 해변을 뛰어다니던 기억, 농사일을 돕던 머슴들의 일과, 고집 센 염소에 끌려다니던 기억, 소뿔에 받친 경험이 아직도 떠오른다. 밭일이 끝나고 나면 감자떼나 밭작물을 가득 실은 소 구루마(소 달구지를 그렇게 불렀다)를 할아버지가 몰고 집마당으로 들어섰는데, 그 모습은 정말 요란했다. 새벽에도 할아버지의 엄명이면 어쩔 수 없이 논에 물을 대러 가곤 했다. 그럴 때면 옆 논의 주인과 다툼이 생기곤 했다. 

외할머니가 계시던 녹동에서는 바다풀 내음과 해우(김)를 말리던 풍경이 지금도 생생하다. 요즘은 그때의 그 바다냄새를 맡을 수 없다. 방죽에 앉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동경의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던 그 소년이 바로 나였다. 

가장 크게 자리한 기억은 화순 시절이다. 개울가, 초등학교, 아버지가 근무하던 중학교, 소방서 근처가 내 놀이터였다. 집에는 전축이 있었고, 거기서 흘러 나오던 옛 가요들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어린 가슴에도 잔잔한 감동을 주던 노래들이다.

3. 대둔산 근처에서 하룻밤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대둔산에 도착했다. 숙소를 찾다보니 민박보다 산장이 나을 것 같아 대둔산장 2층에 여장을 풀었다. 갑자기 대만 카오슝의 포모사 호텔이 생각났다. 

72층 객실에서 내려다본 카오슝항 야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시설은 과거에 묵었던 그 어떤 호텔보다 좋았다. 정말 넓고 쾌적한 호텔이었다. 그러나 경관으로 따지자면 신혼여행 때 묵었던 괌의 PIC 호텔이 최고였다. 아침에 커튼을 걷으면 화사한 햇빛과 함께 탁 트인 해변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지금도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대만에서는 주로 신주(新竹) 과학단지 근처의 Lakeshore 호텔과 Caesar Park 호텔에 이용했다. 주말이면 호숫가를 산책하거나 가까운 고기봉(古岐峰) 박물관을 찾곤 했다. 고기봉에서는 중국에서 가지고 온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서유기 테마공원도 볼 수 있었다. 여름이면 호텔의 풀장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푹푹 찌는 날씨에 제일 좋은 피서였다. 

미국 출장길에는 메사추세츠주의 챔스포드에 있는 Hawthorn Suite 호텔에 묵었는데, 아침마다 할머니들이 조리한 아침 부페를 즐길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각자의 직업을 이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만났던 컴퓨터 프로그래머들 가운데 나이 50을 넘긴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보스턴의 음식점에서는 할머니들이 서빙을 보고 있었고, 본사의 Information Desk에서도 할머니 한 분이 안내를 보고 계셨다.

대둔산장 숙박비는 3만 원으로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출출해져 밖으로 나가니 전라도 음식이 먹고싶어졌다. 6천 원짜리 비빔밥을 파는 집이 있어 들어갔다. 맛있게 식사를 마친 후 주인아주머니께 대둔산 등산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팜플렛까지 건네주며 마천대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설명해 주셨다. 작년에 처음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도 그랬다. 

아내와 두 명의 개구장이 아들과 함께 대한항공 마일리지로 항공권을 해결하고, 렌터카를 빌려 펜션을 숙소로 삼았다. 누가 제주도를 여행한다면 이런 설정이 보다 경제적임을 귀뜸하고 싶다. 펜션 근처에 대형마트가 있어 식사 준비가 수월했는데, 주인아주머니 역시 팜플렛을 주며 여행코스를 알려주었다. 여행지에서는 숙소나 음식점에서 여행 정보를 구하면 된다.

대만 타이페이의 야시장도 기억난다. 버블티를 마시며 야시장을 구경했는데, 즉석에서 뱀을 잡아 피를 받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식도락 천국인 대만에선 여러 음식을 맛볼 수 있는데, 토속요리인 삭스핀이나 딤섬(만두요리), 소내장 요리 및 세계 곳곳의 음식들이 호텔을 중심으로 철마다 시연되고 있었다. 로컬 음식들을 잘 먹지만 대만 요리 중 냄새 나는 풀인 샹차이와 썩은 두부는 혐오한다.

처음 전주비빔밥을 접한 것은 중학교 시절 유네스코 활동으로 내장산에 갔을 때였다. 그때는 맛에 반해 친구들이 남긴 것까지 먹다가 탈이 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배불리 먹는 게 쉽지 않았는데, 반찬 하나에도 가격이 매겨져 있어 이것저것 시키다 보면 금세 예산을 초과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일본 사람들과 함께 국내 식당에 갔는데 눈이 휘둥그레진 그들이 물었다. 

“매일 이렇게 먹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니 한국이 너무 부럽다며 놀라움을 표현했다. 

싱가포르에서는 '락사'라고 불리는 매운 라면을 먹었는데 샹차이가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맛이 괜찮았다. 훗날 여유가 생긴다면 가족들과 함께 싱가포르의 East Coast를 방문해 페퍼 크랩과 칠리 크랩을 다시 즐기고 싶다. 보스턴의 퀸시마켓에서 배불리 먹었던 랍스터도 맛있었지만 싱가포르의 크랩 요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주머니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동네 주변을 둘러 보았다. 큰 관광호텔도 있었지만 평일이라 한산했다. 파출소장을 만나 산행 코스에 대해 묻자 마천대를 거쳐 용문골로 내려오는 코스를 추천해 주었다. 사실 나도 정상인 마천대까지 올라 갔다가 그냥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다. 현지인의 조언이 틀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싱가포르에서라면 저녁에 시간이 생기면, 동료들과 함께 클락키(Clark Quay)와 보트키(Boat Quay)를 들러 바에 들르곤 했다. 물론 시내로 방향을 돌리면 래플스(Raffles) 호텔의 롱(Long) 바를 들를 수 있다. 난 술을 먹진 않지만 그곳의 음악과 정취를 감상하며 싱가포르만의 색다른 감성을 느꼈다. 클락키에는 벼룩시장이 열리곤 했는데 그곳에서 소설책 한 권을 샀었다. 해변에는 공원이 잘 꾸며져 있고 젊은 연인들이 산책하는 모습이나 잔디 혹은 벤치에 앉아 서로 얘기하는 풍경이 정겨웠다. 교회 식구가 싱가포르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초대를 받고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격조가 높은 아파트라는 인상이 입구에서부터 느껴졌다. 콘도미니엄으로 불리는 그 아파트는 주변 곳곳에 풀장이 있었다. 2002년은 월드컵 열기가 뜨거웠다. 우리 일행은 한국과 포르투갈의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오차드가(Orchard Road)의 야외 레스토랑을 예약한 채 응원을 했다. “오!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을 싱가포르 한복판에서 힘껏 외쳤다. 경기 중에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로부터 격려를 듣기도 했고, 함께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미국인은 미국과 폴란드의 경기 결과를 내게 물었는데, “잘 몰라요 하지만 한국과 미국이 함께 16강에 올라갔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해 주었더니 무척 좋아하는 눈치였다. 사실 우리의 열기 때문에 채널을 바꾼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테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어쨌든 나의 바람대로 미국과 우리나라가 16강에 올라갔다. 응원이 계속되던 중 박지성이 골을 넣는 순간 우리는 서로 부둥켜 안고 좋아했다. 주위의 외국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우리는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러댔다. 지금도 그때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쇼핑을 하러 오차드가를 거닐었다. 그들의 쇼핑 전략을 바로 읽을 수 있었다. 쇼핑시즌이 다가오면 그들은 제품의 가격을 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쇼핑시즌이 돌아오면 엄청난 가격의 디스카운트가 이루어진 것처럼 알리며 관광객의 이목을 끌었다. 그들이 노리던 대로 난 가방과 애들에게 줄 장난감을 구입하고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따뜻한 물에 먼저 몸을 담그며 '이런 순간이 있어 여행이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일본에서는 좁은 욕조 안에서 부대끼며 씻어야 했겠지만, 그래도 내 나라는 야박하지 않아 좋다.

마음에 차지 않던 일본이 그래도 한국과 문화면에서 흡사하다는 것을 여행에서 느꼈다. 12시 넘어서까지 일하느라 한밤중에도 붐비는 지하철역도 그렇지만 우리와 비슷한 밤 뒷골목 풍경도 흡사했다. 뒷골목에서 신입사원이 차려 자세로 선배사원의 얘기를 경청하고, 과음 탓에 토하는 사람들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억누르는 것을 교육받은 그들이어서인지 엽기적이기까지 한 장면을 그들의 직장에서 접하곤 했다. 더운 여름에도 헬멧을 꾹 눌러쓰고 공사를 진행하던 노동자들을 답답하게 바라보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일본을 성장시킨 배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책을 읽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잠자리에 들었다. 대만과 일본에서 지진을 겪은 경험이 있어, 평안히 잠든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있다. 예기치 않게 온몸이 흔들리고 건물까지 흔들렸었다. 그 순간들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확실하게 들어 둔 '천국보험'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4. 대둔산 산행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듣고 등산 준비를 했다. 수건과 물통을 챙긴 후 배낭을 메고 어제 갔던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밥으로 청국장을 주문했는데, 집을 떠나 혼자 타지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다. 아니, 차라리 어색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해외 출장은 여러 번 다녀왔지만 국내 여행은 늘 가족과 함께 했기에 혼자라는 사실이 낯설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지 않았을 때에는 아파트 단지에서 함께 버찌를 따기도 했고, 앞 공원에서 밤을 따기도 했는데 그때 기억이 생각났다. 아쉽지만 그래도 작년에는 함께 제주도에 다녀오지 않았던가.

식당에서 물통에 물을 채우고 대둔산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5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곧 케이블카 승강장이 보였지만 나는 도보를 택했다. 굳이 돈을 낭비하기 싫었고 내 체력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동심바위’란 곳을 지났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원효대사가 사흘간 이 바위 밑에서 쉬어갔다고 한다. 나 역시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땀에 젖은 겉옷을 벗었다. 그러나 등산 중에 흘리는 땀은 상쾌함을 안겨준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처럼 더운 지역을 여행할 때면 늘 후덥지근한 날씨가 힘들었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는 나이트 사파리가 인기가 있는지도 모른다. 홍콩에서는무더위 속에서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오션파크(Ocean Park)와 명.청시대의 테마파크를 둘러보았다. 억지로 만든 추억이었지만 홍콩 특유의 활기를 느낄 수 있었던 건 큰 소득이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주롱 새공원과 센토사를 들렀는데, 주롱 새공원은 지금까지 본 새공원 중 가장 규모가 컸다. 더위에 지쳐 있었지만, 플라밍고 연못의 장관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센토사의 언더워터월드 역시 인상 깊었다. 동양최대의 수족관이라 불리던 곳에서 상어나 거대한 가오리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갈 때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대둔산은 결코 만만히 볼 산세가 아니었지만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오르는 데는 수월했다. 흐르는 땀을 연신 수건으로 닦으며 길을 재촉했다. 그러다 보니 일찍 출발한 사람들을 하나둘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중간중간 매점이 있었지만, 역시 문제는 가격이었다. 물을 미리 준비한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윽고 오른쪽으로 '금강구름다리' 이정표가 보였다. 난 쉬지 않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연결하는 철다리였다. 호연지기를 발산하는 듯한 사람들의 외침을 들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할머니할아버지들도 산행을 오신 모양인데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험한 산을 찾으신 건지 궁금했다. 마침내 금강구름다리를 건너는데 밑에 내려다 보이는 절경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호남의 금강'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어서 127계단으로 이루어진 삼선계단에 도착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중도에서 포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고 어지러워서 더 이상 못가겠네. 밑에서 기다릴게, 가방이나 넘겨주소~” 

나는 중간에 끼어 할머니들의 소지품을 하산하시는 할머니에게 대신 넘겨 드렸다. 

“이 산은 참으로 안전에 신경을 썼구먼. 울산바위보다 훨씬 안전한 것 같아. 근데 이 계단은 어지러워서 건너기가 너무 힘드네.” 

동료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로 급경사를 이루며 뻗은 계단을 오르다 보니 나도 현기증이 났다. 할머니들이 올라가기엔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할머니들을 지나 가파른 언덕을 또 오르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을 따라잡으면서 마천대를 향해 힘있게 치고 나갔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며 '산은 힘으로만 오르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의 무게를 발끝에 옮기며 호흡을 조절한 후 허리를 숙인 채 걷다 보니 한결 수월해졌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자기 힘만 믿고 인생을 살아가려 하면 지치지만, 겸손히 자신을 조절하며 살아가는 이가 결국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갑자기 군대 시절 행군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뒤처진 신병(쫄따구라고 불렀었다)들을 위해 늘 수통에 나폴레옹 양주를 담아 두곤 했다. 한 모금 마신 신병들이 다시 힘을 내어 걷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술의 힘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는 운치 있고 축복된 시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군대에선 그렇지가 않다. 내무반에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했지만, 눈이 오던 크리스마스 새벽 우리는 급히 도로 제설작업에 동원되었다. 제설작업이 끝났어도 계속되던 폭설은 우리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결국 하루 내내 파티도 못하고 제설작업만 하다 크리스마스가 다 지나갔다.

드디어 해발 878 m의 정상, 마천대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정상탑 앞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물통의 물을 마시고, 서울에서 왔다는 아저씨 일행에게도 권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귀한 물을 주시다니~” 그분들은 레저업 종사자들이 모여 등산을 왔다고 했다. 잠시 정상의 기쁨을 만끽한 뒤 곧바로 용문굴로 향했다. 내리막길을 달리듯 내려가면서 태고사와 용문굴의 갈림길까지 다다랐다. 태고사쪽으로 가면 금산방면으로 가게 된다. 난 다음을 기약하고 용문굴 방향으로 향했다. 마치 내가 공비라도 되는 양 속도를 내서 달리고 있었다. 사실 난 내리막길을 달리는데 재주가 있다. 내려가는 스텝을 알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지리산 피아골 등반을 했을 때 달려서 산을 타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마냥 달릴 수만은 없었다. 금방 비탈지고 돌이 많아져서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산은 달리며 내려가기보다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내려올 때 더 운치가 있다.

대학교 때 강의도 빼 먹고 친구 차를 함께 타고 마냥 고속도로를 달린 적이 있었다. 당시 가을의 중반이었다. '남자는 가을에 감상적으로 변하는 것인가?'  우리는 포천 방향으로 가다가 광릉이라고 적힌 팻말을 따라 코스를 바꾸었다. 그때는 광릉에 수목원이 있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내 눈이 경이로 가득 찼다. 이제껏 그렇게 아름다운 경치는 처음이었다. 단풍이 그렇게 멋있는 줄 처음 알았다. 나는 창을 통해 두 팔을 펼치고 “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동화의 나라에 온 것인 양 잠깐 착각에 빠졌다. 그 좋은 경치를 뒤로 하고 돌아가는 길에 또 실수로 강릉방면으로 빠지면서 동해안까지 갔다. 동해안의 바닷물결은 위엄이 있었고 차가웠다. 우리는 해안선을 따라 동해안을 구경했고 설악산을 경유해 미시령을 넘었다. 아름다운 자연 때문에 우리는 점점 동화되고 있었다. 현대전자 시절 충주호를 방문했을 때 억새풀로 가득찬 습지 경관을 보고 매료된 기억도 떠오른다. 대만에서 소인국을 방문했을 때 만리장성의 축소판을 보았다. 그때 난 중국에 다녀온 것처럼 인증 사진을 찍고 있었다.

돌이 많은 지역을 조심해서 지나가자 '용문굴'이라고 적힌 팻말을 보았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용이 승천했다고 한다. 두 바위가 맞닿아 생긴 굴을 지나자 전망대가 나왔다. 푸르른 녹음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힘을 내서 고함을 질러 보았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진 등산 끝에 다리가 후들후들거렸지만 마음은 상쾌했다. 그때 갑자기 앞에 집 한 채가 보였다. 팜플렛에 보니까 아마도 이곳이 '신선암'인가 보다. 부적 같은 종이들이 줄에 잔뜩 걸려 있었다. 주인인 듯한 아저씨가 우두커니 서 계셨다. 인사를 해도 본체만체다. 그냥 지나치려다 샘이 있어 물동냥을 했다. 

“아저씨 물 좀 마셔도 되겠습니까?” 아저씨는 말없이 팔짱만 낀 체였다. 허락으로 생각하고 바가지에 물을 받아 마셨다. 물이 정말 맛있었다. 그래서 한 바가지 더 떠 먹었다. 신선암이라 했던가. ‘물맛이 좋아서 신선암인가?’ 또 저만치 내려가니 개울가가 보였다. 땀도 많이 나고 해서 그 물에 얼굴과 손을 씻었다. 참 신기했던 것은 그렇게 물이 매끄러울 수가 없었다. 마치 비누라도 바른 것처럼 물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느낌이 틀림이 없다면 필시 사연이 있는 물이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분검사를 한다면 밝혀지겠지만 정말 신선한 느낌이었다.

도쿄에 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끼하바라에 꼭 가 보고 싶어서 휴일에 그곳을 찾았다. 아끼하바라는 전자제품을 파는 특정 지역을 말한다. 말로만 들었던 아끼하바라를 방문한 후 머리 속에 그리던 환상이 단번에 깨졌다. 싼 제품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하지만 규모를 떠나 시설면에서는 용산에 있는 전자상가가 차라리 나아 보였다. 어느 지역에서는 중고제품에 대한 재판매가 잘 이뤄지고 있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비교가 되었다.

마침내 용문골 매표소에 도착했다. 매표소 안 아저씨는 곤히 잠을 주무시고 계셨고, 나는 깨우지 않고 조용히 지나쳤다. 목적지에 다다른 안도감과 함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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