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서로 존중하는 사회...
어린 시절 홍콩 영화를 보며 복수를 모티브로 수많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중국의 고사에도 보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복수에 진심인 것을 보게 된다. 스승이나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온 인생을 바친 이야기가 칭찬을 받을 정도로 그들의 집단의식에는 복수는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각인돼 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가운데 반기를 드는 국가들에 복수하는 행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는 것이기에 중국의 행보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공자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그들인데 왜 그들은 복수에 진심인 것일까?
유교는 학문에 기반해 윤리 체계를 정립했는데 유교는 인간 관계와 도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부부 관계 등을 확고하게 세우다 보니 원수에 대한 처신은 존중과 이해로 두루뭉실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관계를 끊어버린 원수에 대해 은유적으로 표현한 도덕서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명쾌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원수를 갚는 것이 그 예를 다하는 것이란 결론이 도출된다. 마땅한 관계를 정립하고 합당한 예를 논했지만 그 예를 무너뜨리는 암적인 존재들에 대해 자비와 용서를 무조건 실천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것이다.
유튜브에서 가끔 누가 추천해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곤 한다. 그런데 많은 설교가 횡설수설이거나 권위적이거나 폭압적인데 반해 어떤 목사는 성경적이면서도 공감할 만한 논리를 전달해 눈길을 끌었다. 어느 날은 그가 위의 권세에 순복하라는 내용을 전달하면서 갑자기 한 진영의 대통령들이 지금껏 무엇을 한 게 있냐는 식으로 비난하는 것을 들었다. 서론도 없는 갑작스런 논리 비약이어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신이 정한 권위에 순복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것은 좋았으나 목사가 본인의 편향된 정치색을 드러내는 모습은 너무 꼴불견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그에 대해 느꼈던 좋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종교는 중립을 유지할 때 아름다운 것이지만 요즘 정치와 야합한 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빈정이 상한다.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국민들로부터 개독교란 상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화에서 특히 피해야 할 주제는 종교나 정치나 지역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으로 인해 가족들이 분열되기도 하고 친한 친구 사이도 불화를 겪게 된다. 그러한 주제로 인해 좋았던 친구 사이가 험악해지는 광경을 많이 봤다. 급기야 원수 사이로 변모하는 경우도 있었다. 왜들 그러는지 한심해 보였다. 그것을 보며 누구든 원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입맛이 썼다.
인간의 관계 형성은 무척 중요한 것이다. 잘 쌓은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기에 우리는 대화를 할 때 주의해야 한다. 민감한 사안에 대해 얘기를 할 때에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먼저 상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게 상대를 존중하고 위하는 마땅한 예절이기 때문이다.
올해 5월부터 캐나다 앨버타주에서 시작돼 캐나다 전역에서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산불은 기후변화의 위험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에 미국 동부지역도 산불로 인한 역대 최악의 미세먼지로 인해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뉴욕의 하늘이 붉게 물든 장면도 사진으로 접할 수 있었다. 결국 미국 가구들이 공기청정기를 구입하는 진귀한 사례도 발생했다. 남한 면적의 절반이 넘는 숲이 불에 타면서 발생시키는 연기의 양이 얼마나 많겠는가? 항공편 운행도 다수 중단됐고 동물원도 휴장했으며 원격수업으로 전환한 학교들도 늘었다.
그렇다고 캐나다가 산불 진화를 제대로 하지 못해 미국이 피해를 본다는 말을 미국인이 했다면 미국인들과 캐나다인들은 크게 싸우게 될 것이다. 존중에 대한 주제로 교육을 받았을 때 상대를 대하는 자세를 달리해야 한다고 배웠다. 상대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 최선을 다한 결과를 지금 보고 있다는 식의 사고가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상대와 원수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건강한 사회를 세우기 위해 서로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

댓글
댓글 쓰기